2020. 11. 12. 17:24ㆍ열차의 역사
지난 글에서는 대전역의 개설과
철도의 빠른 개통과 신도시의 개발의 배경은 러일 전쟁을 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경부철도의 부설권을 딴 일본은 1905년 말까지 개통하려고 하였으나, 러시아와 긴장상태가 고조됨에 따라 1년 앞당기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조선철도사] 1915년)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기존의 노선을 변경하여, 노선이 짧고 거주자가 거의 없어 토착세력이 적었던 대전을 통과하는 4안으로 결정되었다. 공사는 4개의 속성 구간으로 나누어졌고, 대전은 '속성 제4차 구간'에 속하였다. 속성 구간은 계획대로 1904년 11월에 대전역의 승객과 화물 운행이 시작되었다.
호남철도의 개통은 일제의 수탈을 노골화 하였다. 대전 거류 일본인들은 1909년 5월 호남선 철도기성회를 조직하고, 분기점의 대전 유치 운동을 벌여 결국 대전으로 결정되었다.([신흥 대전의 회고], 1932년) 호남철도는 1911년 7월 10일 대전에서 연산 간을 부분 개시하였으며([조선총독부 고시],제153호)1914년 1월 11일 정식 개통되었다. 이로 인해 전라도와 충청도의 비옥한 평야에서 생산되는 식량의 공출도 가속화되었다.
대전이라는 신도시는 더욱 급부상하였다. 1910년에 회덕에 있는 군청에 대전리로 옮겨졌고 1932년 충남의 도청소재지가 대전으로 이전하면서 대전역에서 충남도청사를 잇는 신도시 개발의 중심축이 완성되었다. 결국 철도의 빠른 개통을 통하여 대전이라는 신도시 개발은 본격화되었다.
2018 대전 근현대사진전시관 기획전 중에서 발췌
위에 글 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은 겪어보지 않은 우리들의 세대들도 참 싫어하는 걸 보면 정말 지독했던 것 같아요 지들 전쟁 때 전쟁물자 조달에 용이하게 위한 수단으로 철도를 건설한 거라고 생각이 드니까 욕이 나오면서도 우와 신기한 것들이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전역 초기에는 1904년에는 간이역이였다고 합니다.
호남선 철도까지 개통되면서 이용객의 증가와 화면의 증가로 1918년에 개축하였다고 합니다. 일본의 목조양식과 서양의 고전양식을 결합시킨 혼합형 유형으로 건축되었습니다. 1915년 개축한 대구역과 유사하게 만들어졌다고 하는데요 제가 보기에는 완전 쌍둥이 건물인 듯싶습니다.
개축되면서 1918년에 대전역 앞 지하도는 우리나의 철도 역사상 처음 설치된 것이라고 하네요 우와 대박이에요 라고 생각하면서 자료를 찾아봐도 사진은 없었습니다.
그나마 1920년 대전 시가지라고 해서 사진을 찾아서 구해보니 지하도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를 않네요 어디 있는 건가요 너무 궁금해서 끝까지 찾아볼 생각입니다.
위에 사진을 보니 일본어로 된 간판도 보이고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느낌은 참 신기합니다. 대부분이 일본인들 거주지였다고 합니다.
원래 대전의 공주의 한 지역이었는데 대전역의 건설과 동시에 공주시에 소속된 지역이 아닌 한 곳의 도시로 발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나타나게 된 사람이 부동산 투기꾼 1호이자 땅부자 김갑순을 낳게 됩니다.
여기서 먼저 김갑순이라는 인물을 볼까요
어머님께 들은 이야기는 위 사진에 보는 집 지붕이 기와처럼 보이지만 예전에는 초가집이였다고 합니다. 처마끝에는 밥을 얻어먹던 박이 나란히 걸려있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가난했다고 합니다.
김갑순(金甲淳, 1872년 5월 22일 ~ 1961년 6월)
김갑순은 1872년 5월 22일 충청남도 공주군 계룡면 구왕리 사후 증 통정대부에 추증된 김헌종과 그의 부인 밀양박씨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으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다. 본적지는 공주군 공주읍 죽동 245번지 였다. 태어날때 그의 이름은 순갑이었다. 그의 집안은 몰락한 양반 가문이라는 설과 천민이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어려서 고아나 다름없이 자랐으나 공주지역의 부호이면서 전국에 손꼽히는 땅부자가 되기까지는 시대적 흐름을 읽을 줄 알았고 운까지도 따랐던것 같습니다.
공주군청의 관로로 군청의 요강을 담당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관로로 생활하던중 공주 저작거리에서 강간당할 뻔한 여성을 구해주었고 그 인연으로 의남매를 맺었는데 그 여인이 나중에 충청 관찰사의 소실로 들어가게 되면서 김갑순의 충청도 제일 갑부의 길이 열렸습니다.
머리도 좋았나 봅니다. 그여인의 연줄로 1899년 충청남도 관찰부의 아전이 되었으나 글을 몰랐는데 스스로 독서를 하여 한글과 한자를 깨우쳤다고 합니다.
그는 하급 관직과 군수 벼슬 등을 거치면서 거금을 모았으며, 여러 군에서 군수를 지내면서 지금의 공무원의 공무원들이 비리를 저지르는 것처럼 세금을 횡령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30년이 지나서는 '조선 제일의 땅부자'로 불릴 정도로 갑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는 대전역 주변의 땅을 집중적으로 사모으면서 대전이라는 지역이 교통의 요지가 되는 행운과 함께 김갑순은 당대에 큰부자가 됩니다.
1911년 아산 군수로 임명되었다가 곧 사퇴하고 대전극장, 공주극장, 논산극장을 설립하고 많은 돈을 벌어드리게 됩니다. 경성부의 국일관에도 돈을 투자합니다. 계속해서 사업을 확장하면서 돈을 벌어들이는 것 또한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대전좌는 대전극장 자리에 있던 대전극장의 옛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논산극장의 건축양식을 사진을 보니 김갑순이 세웠을 그시대 건축 양식인듯합니다.
김갑순은 공직과 사업을 겸직했습니다. 이는 정보의 습득을 빨리하고 그 정보로 돈의 흐름을 빠르게 잡기 위함이였겠죠
대전역을 중심으로 땅투기를 하여 돈을 벌어들였고 도청이 대전 지역으로 이전한다는 정보를 듣고 공주에 반대 여론에도 대전지역의 유지(대부분 일본인이였다고 합니다. )들을 이용하여 공주에 있던 도청을 이전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도청은 김갑순이 사들인 땅에 이전하게 됩니다.(헌납했다고합니다. 이런 매국노)
친일파이기도 하지만 그의 사업 수완은 대단하다고 느껴집니다. 위 사진에 있는 사람들 중에 김갑순이라는 인물이 있을까요?
그러면서 총독부는 공주에 도청을 내어준 대신에 다리를 하나 지어준다고 합니다. 그다리가 금강대교였다고 합니다.
다리사진을 보는 순간 어이가 없었습니다.
이 다리는 제가 어릴적 외가집에 갈때 봤던 다리와 너무 비숫했습니다. 아니 그 다리였습니다. 지금은 일방통행입니다.
어릴적 공산성 밑에 있는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다리를 걸어서 건너 외할머니댁으로 가면서 코를 훌쩍거리던 추억이 소환되면서 이런 역사가 내가 밟고 있는 이땅에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뭉클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가 태풍이 몰아치는 듯한 힘든 세월을 보냈으니까요
부모님께서 그 언젠가 부자가 되고 싶다니까 김갑순처럼하고 물으시길래 누구냐고 물어 보니 김갑순이라는 사람은 서울에 갈때 반은 남의 땅 반은 김갑순의 땅을 밟아야 된다는 말이 돌았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재산을 보유했었다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교통이 어떤가에 따라서 집값이 오르락 내리락 하니 인간사에서는 어쩔수 없는 건가 봅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궁금하신 내용이나 바로 잡고 싶으신 내용이 있으시면 댓글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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