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역사현장의 가운데 있던 대전역

2020. 12. 7. 17:30열차의 역사


여러분의 대전역의 모습은 언제인가요?


 

625전쟁 대전역앞 군인들

 

일제시대에 건축된 대전역의 모습은 전편에 이야기 해드렸습니다. 

그대전역의 광장을 군인들과 경찰들이 총을 메고 걸어다니고 있네요 지금 만약 이런 모습들을 만난다면 저는 굉장히 공포감을 느낄 것 같습니다. 역사 뒤로 구름처럼 보이는 검은 연기는 불타고 있는 건가요? 

광장에 보이는 사람들은 왜 저렇게 무덤덤할까요 무감각해지는 건가요 아니면 긴강감으로 극도록 긴장하고 있는 걸까요 

둘중 하나겠죠

 

출처 : 조선일보 / 대전광역시공식블로그
6.25당시 대전지구전투에서 이긴 인민군들이 대전시내 동구 인동부근으로 들어오고 있다. 출처 : 세종경제신문

 

자료 조사하던 중 발견한 사진입니다. 

좌측 사진은 1950년 7월 대전 시가에 진입한 북한군의 사진입니다. 북한군의 모습은 최대한 늠름해 보일려고 노력하는 듯 보입니다. 

시민들은 너무 불안했을거에요 

우측 사진은 1950년대 갑천변의 미 제34연대 모습입니다. 굉장히 긴박해 보입니다. 아마도 전투 준비중인한 모습입니다. 제가 만약 저 자리였다면 너무 무서웠을것 같습니다. 하단 사진은 서울이다 대전이다 논란을 겪는 사진이라고 하는데 대전이든 서울이든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인건 맞습니다.

전쟁을 겪은 부모님께서 언제나 말씀하셨거든요. 

북한에 관한 뉴스만 나오면 전쟁은 다시는 없어야 한다면서 그 공포감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고 하시네요.

대전과 대전역의 수난은 다음 사진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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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동경 UN군 사령부를 통해 충남역사박물관에 소장돼있는 폭격도면. 일제시대 제작된 지도에 덧입힌 이 도면에 따르면 대전역 경부선 철로와 도청 뿐 아니라 현 대전고등학교 인근과 충렬탑 인근까지 불바다로 변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폭격도면 중 빗금 친 부분이 당시 집중적인 폭격이 이뤄진 지역이며 색깔 칠해진 부분이 폭격 등으로 화재가 발생했던 곳이다.

일본 동경 UN군 사령부를 통해 현재 충남역사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사진 및 도면 자료 등에 따르면 대전역 경부선 철로와 충남도청 구간이 집중적으로 폭격됐으며 이로 인해 중앙로 뿐 아니라 현 대전고등학교 인근, 충렬탑 인근, 현 대전역 동편 광장 일대까지가 불바다로 변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미군측은 사진에 대해 1948~1951년 사이에 촬영된 것으로 밝히고 있지만 폭격 후 이를 곧바로 자료화했던 당시 미군측의 전략으로 미루어볼 때 폭격이 이뤄진 직후에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폭격 도면은 당시 촬영된 사진을 일제 시대에 제작된 지도에 덧입히는 방식으로 제작됐다. 그 동안 대전역~충남도청 구간이 전쟁 당시 초토화됐다는 사실은 전해져왔지만 폭격이 이 처럼 광범위하게 이뤄진 것과 초토화의 이유가 교전이 아닌 항공폭격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으로 밝혀진 사실이다.

...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폭격이 이뤄진 시기는 50년 7월에서 8월경으로 추정되며 당시의 전쟁 상황은 낙동강 유역까지 밀려간 유엔군이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전북 이리역 등 전국 주요 요충지를 폭격했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오키나와 미 공군기지에서 출격한 B-29기 33대가 약 4시간에 걸쳐 대전 역사를 비롯해 경부선 철로 및 호남선 철로 일대를 폭격해 인근 2km정도가 황폐화됐다”며 “당시 보문산에서 폭탄이 투하되는 장면을 목격했으며 이 후 찾은 시가지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고 술회했다.

 

중도일보 기사 중 발췌


 

북한에서 그린 대전 전투 그림 출처 : Wikiwand
7월 15일 금강 근처에서 북한군을 포격하는 미군의 곡사포 : 출처-Wikiwand
6.25전쟁시 폭격으로 폐허가 된 대전시가지

 

대전역의 중심으로 화재가 나고 폭격을 맞은 곳을 표시한 것을 보니 대전 전역이네요

제 아버지의 고향은 대전입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셔서 지금에 제가 있는 것이 완전 기적인듯합니다. 

대전역 또한 폭격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겠죠 

물적 피해보다는 전 그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대전역 또한 파괴되어 사용하기가 힘들 정도로 되버렸네요 

아래 사진들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대전역 주변의 풍경과 방치된 기관차 등을 보여주는 사진입니다. 이 사진들은 미군 사진 기자가 촬영한 사진자료들입니다. 출처 :  m.blog.naver.com/PostList.nhn?blogId=thaitour 아솜배낭여행에서 가져왔습니다. 만약 원하지 않으시면 말씀해주시면 가리겠습니다.

 

 

 

전쟁중에도 가족들을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한 어머님들의 모습입니다. 어머님들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너무나도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그런데요 전쟁중에도 화폐가 통용되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우리 민족은 일제시대 후 바로 전쟁이라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1952년 대전역 모습 / 1952년 대전역 중앙로 모습 출처 : 금강일(육군제공)
대전 선화동 영렬탑과 시가지 모습 / 끊어진 공주 금강철교 모습 출처 : 금강일보(육군제공)

 

위에 사진들은 6·25전쟁 당시 미군으로 참전한 토마스 상사(1910∼1988년)가 당시 한국의 생활상을 35mm 필름카메라로 찍은 것들이라고 합니다. 세상에는 정보를 저장하는 분은 언제 어디서나 있는 것 같아요 대단하십니다. 토마스 상사님 덕분에 부모님께서 겪으신 현장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대전역과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마지막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6.25 당시 금강및 대전지구 전투에서 공을 세운 미 보병 24사단장인 윌리엄 딘소장과 콜린스 미 참모총장, 그리고 워커중장, 북한에 생포된 뒤 북한방송, 그리고 3년6개월후 포로로 생활되는 모습[사진= 신수용 대기자. 연합뉴스] 출처 : 세종경제신문(http://www.sejongeconomy.kr)

 

대전역 앞에는 동상이 서있는데요 솔직히 저는 처음 알았습니다. 기관사분들 특히 제나이에 반정도 밖에 안된 분들이 어떻게 그렇게 하셨는지가요 딘 소장을 구출하는 작전에 기관사 분들이 명령을 받고 작전에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6.25 당시 대전지구 전투에서 행방불명된 미 보병 24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의 구출명령을 받고 옥천에서 기관차를 몰고 대전역으로 온 대전철도국 김재현 현재영 황남호 기관사의 동상이 대전역에 세워져 있다[ 사진= 대전동구청 제공 출처 : 세종경제신문(http://www.sejongeconomy.kr)

 

여기서 딘소장을 잠깐 알아보겠습니다. 

인민군은 윌리엄 딘소장이 이끄는 미 보병 24사단과 한국군이 합친 아군과 대치,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딘 사단장은 한국정부 수립을 도왔던 분으로 한국 지형을 알고 있는 지휘관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이 전투에서 24사단과 한국군은 무너졌죠 흑흑

하지만 밀고 내려오던 북한군을 지연시키면서 낙동강 전투에서 승리의 발판을 마련한 분이기도 합니다. 

후퇴하면서 어떠한 연유인지 모르겠지만 홀로 쫓기는 처지가 되고 몇달을 대전 인근에서 버티다가 포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평양으로 이송된 후 3년 6개월을 포로로 수감생활을 했고 종전 후 포로 교환때 미국으로 넘겨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분은 그 이후 한국에 오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포로가 되는 과정에서 도와주러 온 자신을 인민군에 팔아 넘긴 우리나라 국민으로 인해 포로가 되었으니 배신감과  인민군의 포로 수감생활이 너무나도 끔찍했다고 합니다. 

저도 그건 이해가 됩니다. 
팔아넘긴 그 분은 종전 후 실형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대전시가 인민군에게 점령당한 날 1950년 7월 19일 정부는 은밀히 지령을 내려 대전 철도국 소속 김재현 기관사와 현재영, 황남호 부기관사에게 딘 소장과 우군을 구출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6.25 당시 대전철도국 소속 김재현기관사와 현재영· 황남호 부기관사에게   "북한군이 점령한 대전으로 들어가서 미군 제24보병사단장인 윌리엄 딘 소장과 우군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들 세분은 미 특수부대원 30명과 함께 기관차를 대전역까지 갔었다. [사진= 신수용 대기자Db} 출처 : 세종경제신문(http://www.sejongeconomy.kr)

 

미군 결사대 30여명과 옥천에 멈춰져있던 증기기관차를 몰고 대전으로 향했고 28살 김재현 기관사가 모는 기관차차는 인민군의 포탄과 총탄을 뚫고 대전역에 도착했고 결과는 참혹했다고 합니다. 

결사대 30여명중 27명이 전사했고 김재현 기관사는 전신에 총상을 입고 순직했다고 합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생각하니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현재영 부기관사도 팔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고 막내 황남호 기관사가 기관차를 운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전역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 딘 장군과 우군은 수색을 했으나 없었으며 소재 파악조차 못했다고 합니다.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황남호 부기관사께서는 기관차를 다시 운전해 옥천역까지 갔다고 합니다.

그 과정을 다시 갔다는 내용을 읽고는 입이 다물어 지지 않았습니다.

포탄과 총탄을 맞은 기관차가 멀쩡했을까요? 정말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을꺼잖아요

그 상황에서 기관차를 몰고 다시 갔다는 것은 지금의 제 머리로는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 당시의 기관차가 용산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전 현충원에도 열차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그 열차는 아니고 같은 기관차이겠지만 교육적인 자료로 여러분들의 자녀분께 보여 주실 수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6.25 당시 대전철도국 소속 김재현기관사와 현재영· 황남호 부기관사에게   "북한군이 점령한 대전으로 들어가서 미군 제24보병사단장인 윌리엄 딘 소장과 우군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들 세분은 미 특수부대원 30명과 함께 기관차를 대전역까지 갔었다. 당시 기관차가 용산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사진= 신수용 대기자Db} 출처 : 세종경제신문(http://www.sejongeconomy.kr)

 

세분 기관사님들의 나이를 보자면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였습니다.

지금의 우리들의 모습을 볼때 어린 아이들 같았는데 조국이 부른다고 망설임 없이 몸을 내던졌다는 것만으로도 최고의 영웅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영, 황남호 기관사님께서는 대전에서 거주하시다가 2006년과 2010년에 영면에 드셨다고 합니다. 

현재영님은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고합니다.  작전당시 순직하신 김재현 기관사님도 1983년 국방부에서 국립묘지 안장을 승인해 철도인으로는 최초로 서울 동작동 국립 현중원에 안장되었고 고인의 뜻을 기리고 있다고 합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대전역 광장에 가시면 보실 수 있는 조형물

 

무심코 지나쳤던 동상이 이런 역사가 있었다고 생각하니 제가 참 앞만 보고 옆을 돌아보지 않은 것 같아서 반성하였습니다. 

대전역의 역사의 한부분이겠지만 이분들의 공이 없었다면 우리의 현실에서 어떠한 변화가 있을까하고 생각하면서 이글을 마치겠습니다.

지금의 우리 주변에도 영웅들이 어려울때 등장하는 것처럼 코로나로 힘든 이시기에도 의료진들과 이겨내고 계신 여러분이 영웅이십니다. 

우리 꼭 이겨냅시다.